사각사각, 검은 가루가 하얀 종이를 물들여간다. 키보드가 더 익숙해진 이 세계에서 나는 여전히 종이와 펜을 이용해서 글을 쓴다. 조용한 방 안을 글씨 쓰는 소리로 채운다.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와 합쳐지면 이만한 노랫가락도 없다. 이 방 안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, 사실은 가득 차 있다. 나의 생각으로, 나의 글로. 이 곳은 방이면서 방이 아니다. 그저 내가 글을 쓰는 공간일 뿐.
펜보다 키보드로 글을 쓰는 게 익숙해진 현대사회. 째깍이는 소리보다 전자로 된 숫자를 보는 시계. 누군가는 이를 아날로그 방식이므로 구식이라고 부르겠지. 하지만 아날로그가 옛날 방식이고 디지털이 지금 방식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. 적어도 내가 펼치는 세계는 산수화 되어 있지 않다. 무언가를 이분화 시킨다면 그 분류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것은 이질적이 되거나 틀에 맞춰버리겠지. 하지만 원하는 것은 틀에 맞추어지지 않은 세계.
오늘 유독 필감이 좋다. 이런 날도 있다. 그저 쓰고 싶은 날. 뭐라도 이어가고 싶은, 이 감촉을 기억하고 싶은 날. 긁혀나가는 흑연만큼 까맣게 물들어가는 종이, 그리고 이렇게 종이를 염색하는 데에 진심인 나.
필감이 좋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. 이상하다. 앞 문장을 쓰면 뒷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. 유독 머리가 맑아. 내가 원하는 세계를 전부 펼칠 수 있을 것 같다. 조금만 더, 조금만 더.
피로도 잊고, 마치 내가 아닌 기분을 느낀다. 부유한다. 나는 관찰자이자 기록자. 이분법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꿈꾸고 노래로 자아낸다. 음유시인의 기분이 이러할까. 내가 관찰하는 인간은 나보다 더 자유롭고 많은 것을 해낸다. 나도 겪었던 일, 나는 겪지 못했던 일들.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주인공. 그러다가 문득 깨달아버린다.
―이런 나를 관찰하고 있는 당신은, 누구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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